때를 알고 물러날 때 얻게 되는 축복, 뭐냐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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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4.29. 오후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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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이네 시골살이 9] 가야 할 때를 아는 아름다움을 깨닫다【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아함을 가르쳐주던 목련이, 봄의 화사함을 보여주던 서부해당화가, 수줍음에 붉게 웃음 짓던 미산딸나무가, 진한 향기로 유혹하던 라일락이 이제 내년을 기약한다. 지금은 가야 할 때라고.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후략) 
- 이형기, '낙화' 


가야 할 때를 아는 아름다움

이 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이다. 친구가 교과서에서 배우지도 않은 시를 읊으며, 얼마나 멋지냐며 나에게 말한다. 여자 친구와 이별한 뒤 이 시구절로 자기를 위로한 모양이다. 나는 당시 연애와 문학에 대해 전혀 눈을 뜨지 못한 어리숙한 아이였다. 그런데 친구는 일찍 이 세계에 눈을 떴다. 친구가 멋있어 보여 친구 옆에 붙어 다니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수십 년이 흘러 교사 정년퇴임을 앞두고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인가 보다 '어떤 마음'으로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했다. 그때 이 시구절이 떠올랐다. 삶의 큰 틀이었던 직업을, 싫든 좋든 이제 내려놓아야 할 때이다.

직장은 개인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고, 가정 경제의 바탕이다. 나는 정년퇴임 하는 날까지 교사라는 직업이 버거워 힘들었지만 그래도 교사인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 어디에서도 교사라는 직업으로 주눅이 들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의 직장이 우리 집 경제의 유일한 원천이었다. 아내의 지극한 검소함으로 아들과 딸의 뒷바라지를 큰 무리 없이 했다. 그리고 가끔 외식과 여행으로 소소한 행복도 누렸다.
 
그런데 이제 물러나야 한다. 나의 의지로, 열정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 교사로서 자부심만 있었지, 부족한 능력으로 교사 역할을 충분히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지 말고 학교를, 교사를 내 삶에서 완전히 잊어야 한다.

누군가가 말했다. 지금까지 아이들을 지도해 왔으니, 퇴임 후 '이것도 해보지', '저것은 어때'. 나는 그 말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야 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주말마다 1년 6개월 동안 한 일

하나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새 길을 시골에서 찾았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시골 오지에 조그만 집을 마련했다. 시골살이는 몸을 움직여야만 한다. 지금까지 못 하나 박은 적이 없고, 형광등 교체조차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이 길을 택했다.
 
집을 마련하고 먼저 한 일이 잔디밭 정리이다. 집 둘레가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햇볕이 들지 않은 그늘진 곳의 잔디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여 보기도 흉하고, 비가 오면 다니기조차 힘들었다. 사람들은 잔디 가꾸는 것이 힘이 드니 잔디를 걷어내고 돌을 깔든지 아예 시멘트로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을 보탠다.

그래서 잔디를 걷어내고 쉼터로 만들었다. 그 작업을 주말마다 1년 6개월 동안 하였다. 몸이 정말 힘들었다.
  
▲ 앞마당 잔디밭 2년여 동안 방치되어 듬성듬성한 곳이 많은 잔디밭이지만 이제 알뜰히 가꾸어 나갈 생각.
ⓒ 정호갑

 
그런데 잔디가 주는 매력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파릇파릇한 잔디색이 주는 신선한 생명감이 참 좋다. 그래서 앞마당은 잔디는 그대로 남겨 두었다. 2년여 동안 잔디밭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잔디가 듬성듬성한 부분이 있다. 이제 잔디 영양제도 뿌려 주고, 풀도 뽑고, 잔디도 깎으며 잔디밭을 가꿔 볼 생각이다.
  
▲ 풀과 나무가 우거져 있는 텃밭 2년여 동안 방치되어 있던 텃밭.
ⓒ 정호갑

 
두 평 정도 되는 텃밭도 새로 일구었다. 엉켜있는 풀과 나무를 정리하고 흙을 갈아엎고 주위를 깨끗하게 하고 두둑과 고랑도 만들었다. 고작 이것 하나를 만드는 데 이틀이나 걸렸다, 근데 그럴듯하다.

이곳에 가지와 상추를 심을 것이다. 상추는 반찬으로, 가지는 차를 만들어 이 먼 곳까지 찾아와 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할 것이다.
  
▲ 새로 일군 텃밭 2년여 동안 묵혀두었던 텃밭을 새로 일굼.
ⓒ 정호갑

 
그동안 손길이 닿지 않았던 석축을 살펴보니, 꽃들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꽃들이 숨을 쉴 정도로 가지를 치고, 촘촘한 꽃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주고, 흙을 북돋워 준다. 그러니 꽃들이 환하게 웃음으로 보답해 준다.
  
▲ 석축 가지치고, 촘촘한 곳은 틈을 만들어 주고, 흙을 돋아주니 석축의 꽃들이 활짝 피어남
ⓒ 정호갑

 
정원을 만들고 나무를 심는다. 땅을 파고, 고르는 일이 아직은 나에게 버거운 일이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고 나면 그 변화한 모습에 기분 좋다. 심고 나면 내일이 기다려지고, 내일이 되면 무사함에 안도하고, 물을 주면서 내년을 기다린다. 내일이 기다려지면 축복받은 삶이다.
 
하루 일을 마무리할 무렵 휘파람새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듣고 아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정원을 다듬고 있던 아내도 몸을 일으키며 나를 바라본다. 그 모습은 나에게 '들었지요? 맞제?'하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웃음으로 '맞다'라고 답한다.

지난해에도 저 휘파람새 소리가 몸의 고단함을 잊게 해 준 기억인데 올해도 어김없이 들려준다. 참 좋다! 이 축복은 물러남에서 비롯되었다.
 
성숙하는 영혼

나는 보통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난다. 학교도 다른 선생님보다 최소한 한 시간은 먼저 가서 하곤 했다. 가서 내가 하는 것은 수업 준비이다. 그래야만 다른 선생님과 비슷하게나마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로지 나만의 시간은 아니었다.
 
시골살이하면서도 일찍 일어나는 버릇은 한결같다. 아내보다 두 시간은 먼저 일어난다. 고독을 즐기는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다.
  
이때 나는 어제의 일을 되돌아보고, 오늘 할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마음,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감정, 어리석었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더듬어 본다. 사람은 안 바뀐다고 하지만, 이렇게 되새기고 다짐하는 시간을 가지면 언젠가는 좀 더 성숙해지리라는 기대와 위로의 시간을 갖는다.

또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이 시간은 적어도 내 나이만큼 성숙한 삶을, 내 영혼이 조금이라도 맑아지길 바라는 고독의 시간이다. 이 고독의 시간 또한 완전한 물러남에서 비롯되었다.
 
시골 우부가 읽은 이형기의 '낙화'는 '가야 할 때를 아는 아름다움, 물러남으로 얻은 축복, 고독의 시간으로 성숙하고 맑아지는 영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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