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인생 흑역사인 ‘나’…아버지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4. 4. 28. 18:1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씨네프레소-120] 영화 ‘변산’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학수(박정민)는 어린 시절 ‘잘 나가는’ 학생이었다. 힘이 세고 인기가 많을 뿐 아니라 예술적 재능까지 빛났다. 고등학생 때는 전국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성인이 된 뒤에도 당연히 잘 나갈 줄 알았는데 현실은 달랐다. 래퍼가 되겠다고 고향 변산을 떠나 상경했으나 좀체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다. 백일장에선 장원했던 그는 ‘쇼미더머니’에선 장원 급제하지 못했다.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나이만 먹었다. 꿈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때다.

‘변산’(2018)은 이처럼 인생의 갈림길에 선 남자를 그린다. 학창 시절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는 왜 부러움을 사지 않는 존재가 됐을까. 영화는 여전히 그가 과거에 발 묶여 있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어떻게든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잘 나가던 학수(박정민)는 왜 성인이 돼서 제자리에 맴돌고 있을까. ‘변산’은 그 원인을 과거에 묶여 있는 그의 성격에서 찾는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바람 피우느라 가족 내팽개친 父, 이젠 효도 안 한다고 서운해 해
‘쇼미더머니’에서 또 떨어지고 낙담한 그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극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신원미상의 통화 상대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한다.

학수는 이 전화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진다. 그에게 아버지는 이미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조직폭력배였던 그의 아버지(장항선)는 엄마를 두고 외도하며 가정을 내팽개쳤다. 심지어 엄마의 장례식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경찰들이 장례식에 찾아와 그의 아버지 행방을 묻는 바람에 조용한 애도의 시간도 갖지 못했다.

원망하는 아버지였음에도 찾아간 이유는 사망하기 직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뇌졸중은 가벼운 수준이었고, 관리만 잘하면 회복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평생 아들을 보살핀 적 없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이제서야 찾아온 것이 서운했던 모양이다. “아들자식은 개자식”이라는 폭언을 내뱉으며 아들 맘을 긁는다.

학수는 고향 변산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진다. 해준 것도 없이 자기 발목만 잡는다고 생각한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내일모레 30살인데 친구의 ‘꼬붕’이 되다니
영화는 원치 않게 고향에 돌아간 그가 계획보다 오래 머물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을 주로 담았다. 고향에서도 그의 삶은 점점 더 꼬여서, 초등학교 때 자기가 괴롭혔던 동창 용대(고준)의 꼬붕(부하의 비표준어)이 된다. 어렸을 때 비실비실하던 용대는 커서 조직폭력배가 됐고, 과거에 자신이 당했던 괴롭힘을 돌려주면서 둘 사이가 역전된 것이다.

‘아버지’와 ‘용대’는 서로 다른 결을 가진 학수의 과거다. 아버지가 남긴 상처는 학수가 발전하려 할 때마다 발목을 잡는다. 그가 랩배틀에서 ‘어머니’라는 제시어를 받고, 실수하는 모습이 이를 보여준다. 아버지 때문에 고생만 하다 떠난 어머니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그에게 좋은 핑계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과감하게 한 발 더 나갈 용기가 생기지 않을 때마다 ‘나는 아버지에게 상처받은 인간’이라는 구실 뒤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싫어하지만 적극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학수는 조폭이 된 용대에게 괴롭힘당한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용대는 그의 찬란했던 시절을 돌아보게 하는 과거다. 용대를 괴롭히던 시기 학수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었다. 그러나 지금은 용대마저도 자신을 괴롭힌다. ‘내가 옛날엔 멋졌는데’라는 생각이 자꾸 떠올라 더 비참해진다. 아버지와 연결된 과거에 양가적 감정을 갖는 것만큼이나 그는 용대와 이어진 과거에도 양면적 마음을 갖는다. 꼬붕이 된 상황을 누구보다도 부끄러워하지만 애써 벗어날 노력은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연민의 성향이 있는 학수는 그런 비극적 상황을 자기 곁에 두는 것을 아주 싫어하진 않는 듯하다.
고등학교 시절엔 분명 인기 많고 미래 밝은 학생이었는데, 왜 성인이 돼서 방황하고 있을까. 학수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타고난’ 재능에 머물렀던 학수, ‘부족한’ 재능을 갈고닦은 선미
학수를 짝사랑하는 선미(김고은)는 그와 대조되는 사람이다. 선미는 주목받지 못한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개의치 않는다. 고등학교 때 학수를 좋아하고도 거절당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초반에 학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고 그에게 전화를 건 사람이 선미였다. 그를 보고 싶어서였기도 했고, 그가 자식 된 도리를 다할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기도 했다. 선미에게는 현재 상황이 더 중요한 거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 병수발을 하게 된 선미의 상황도 평탄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선미는 현실 속에서 뭘 할 수 있는지 계속 고민하는 인물이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학수는 선미를 통해 크게 자극된다. 선미 또한 글 쓰는 걸 좋아했지만 과거엔 학수만큼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렇지만 선미는 공무원으로 일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자기 소질을 계발했고, 영화 후반부엔 방송사 인터뷰를 받을 정도로 독자들의 관심을 받는 작가로 성장한다. ‘타고난’ 자기 소질을 세상이 알아볼 시간만 기다렸던 학수와 달리, 선미는 자기의 부족한 재능을 세상이 좀 더 선호하는 방식으로 갈고 닦은 것이다.
선미와 학수는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대조되는 인물이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다시 말해 학수와 선미는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차이 나는 인물이다. 학수는 과거를 지나치게 그리워하거나 원망하는 삶을 한다. 반면, 선미는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과거대로 두고 앞으로 나아간다. 학수가 과거의 상처와 영광을 핥으며 고등학생 학수에 머무는 동안 선미는 조금씩 나아가며 진정한 어른이 된 것이다.
과거와의 작별
사실 학수가 아버지에게 당한 일은 정서적 학대에 가깝다. 그가 큰 상처 때문에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 이해할 만할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는 상처 때문에 진일보하지 못하는 건 결국 자기 손해라는 이야기를 한다. 과거를 훌훌 털고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아픔을 준 아버지를 꼭 사랑하거나 용서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세우기 위해서란 것이다. 마흔이 돼도 예순이 돼도 자기연민이나 하고 있을 거냐고 묻는 듯하다.

학수는 자신을 꼬붕으로 부리던 용대와 대결한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학수는 두 가지 펀치로 과거와 작별한다. 아버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용대의 얼굴에도 주먹을 날린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사람과의 관계도 좋아진다.

아마 이 영화에 낮은 평점을 준 관객이 많았던 배경엔 이런 서사의 비현실성이 존재할 것이다. 일단 30대를 앞둔 남성이 옛 친구의 ‘꼬붕’이 된다는 설정부터가 비현실적인 데다가, 그런 관계가 주먹질 한 번으로 나아진다는 것도 너무 판타지스럽다.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는 자신에게 상처 준 부모, 형제, 친구에게 주먹을 한 방씩 갈기라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계속 붙들려 있는 어떤 과거의 망령이 있다면 그것과의 의식적인 단절이 필요하단 이야기다. 왜냐면 우리 머릿속에 과거의 상처나 영광은 너무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를 넘어서거나 이에 필적할 다른 이미지를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극복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좋다는 이야기다.

영화 ‘변산’ 포스터.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씨네프레소’는 OTT에서 감상 가능한 영화와 드라마를 리뷰하는 코너입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 구독 버튼을 누르면 더 많은 리뷰를 볼 수 있습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