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의견] 왜 그를 기리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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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4.26. 오전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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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의 빈소. ⓒ 연합뉴스
2002년을 월드컵 4강 진출이나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시절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다른 일을 기억한다. 그해 2월, 홍세화가 한겨레에 입사했다. 어느 날, 그가 찾아와 존댓말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얼마 전까지 의견 지면을 담당했던 기자의 의견이 궁금하다고 했다. 뜻은 좋은데 잘 안될 거라고 참 건방지게 답했다. 입장만 분명하면 된다는 한국에서 그런 구상이 통할 리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조용히 웃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보란 듯이 만들었다. '왜냐면'이었다. 그것은 예전의 칼럼 지면과 달랐다. 한 주제에 집중해 전문성을 갖춘 글만 골라 담았다. 추론의 수준과 품격을 갖췄다면 입장의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그 기획보다 신기했던 건, 그 사람이었다. 글 쓴다 싶을수록 남의 글에 관심이 없다. 제 글이 최고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달랐다. 남이 쓴 좋은 글을 진심으로 구했다. 시키지 않은 일을 밤낮으로 갈고 닦았다.

아무래도 유럽의 '의견 저널리즘'에 매료당한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좋은 주장만 엄선해 게재하는 것은 유럽 주류 언론의 전통이다. 프랑스나 독일 언론은 '주장의 품질'을 관리하려고 학자나 사상가를 종종 편집자로 앉힌다. 르몽드를 정론(正論)이라고 칭하는 것에 아무 잘못이 없다.

군사독재를 거쳐 형성된 한국의 독특한 의견 저널리즘은 그것과 다르다. 한국에선 정론지가 아니라 '논객'만 횡행했다. 자칭 논객은 제 글로 세상을 움직이려는 사람이다. 논객이 르몽드를 읽으면 짜르르한 필명만 본다. 홍세화는 달리 봤을 것이다. 유명 필자가 아니라 품격 있는 언론을 봤을 것이다. 그는 제 명성이 아니라 공론의 세상을 꿈꾸었다.

물론 그도 칼럼을 썼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억지로 겨우겨우 썼다는 걸 주변 사람은 다 안다. "글 쓰는 게 너무 힘들어 안 쓰고 싶다"고 막걸리 마실 때마다 말했다. 그는 칼럼니스트를 자처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그는 진정한 편집자였다. 특히 '좋은 주장들의 편집자'가 되고 싶어 했다. 제 글로 이름을 높이려는 의견 저널리스트는 많았지만, 품격 있는 남의 글을 골라 세상의 합리성을 높이겠다는 의견 저널리스트는 없었다. 한국에선 그가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마지막이 될 것이다.

▲홍세화 당시 가장자리 이사장이 2015년 4월30일 미디어오늘과 창간 20돌 기념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홍세화는 10년을 신문사에 머물다 진보정당에 갔다. 바랐던 바가 잘 구현되지 않는 언론 환경에 깊이 상심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한다. 정당에 갔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대하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권세 높은 정치인이 되려는 게 아니라, 좋은 정치인들이 섞이고 스미는 장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신문사에 오면서 유명 칼럼니스트를 욕심내지 않았던 것처럼.

사실과 의견을 분리해 기자들은 기사만 쓰자고, 예전의 이 칼럼에 적었다. 그건 의견을 낮춰 보는 게 아니라, 의견을 높이는 방법이다. 고뇌하는 사상가의 수준으로 한 문장도 틀림없이 의견을 적는 방법이다. 영미 객관주의 언론은 그 방법을 따라 대통령 후보 지지 사설을 쓴다. 그게 영 내키지 않으면, 유럽 의견 저널리즘의 전통을 따라, 잡다한 소리를 걸러낼 지성인에게 게이트키핑의 권한과 책임을 맡겨야 한다. 홍세화는 후자의 길을 닦았다. 다 걷지 못하고 혼자 씨름하다 너무 일찍 떠났다.

나의 기대와 달리, 그는 엄청 유명하진 않다. 평생 대중을 모은 적 없으니 당연하다. 그는 말이나 글로 사람을 거느리지 않고, 그저 삶으로 주변을 바꿨다. 그를 겪어본 이는 그가 온몸으로 쓴 글이 왜 그리 둔중한지 안다. 그는 생각한 대로 살았고 사는 대로 썼으나, 그 글조차 부끄러워했다. 그가 갔으니, 근거 없고 품위 없고 염치도 없는 자칭 논객들에게 일갈할 이가 이제 없다. 이 지경을 어쩌지 못한 채, 우리는 그를 그리워하며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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