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치와 오른손 봤다면 'K-기생수'는 아쉽다

정철운 기자 2024. 4. 2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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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일본판 '기생수'와 한국판 '기생수-더 그레이'

[미디어오늘 정철운 기자]

▲애니메이션 '기생수'의 주인공 이즈미 신이치와 오른손.

※ '기생수'에 대한 많은 줄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연상호 감독의 신작 넷플릭스 오리지널 '기생수-더 그레이'가 호평 속 흥행에 성공했다. 20세기 말, 만화책으로 '기생수'를 접했던 이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이지만 '기생수-더 그레이'가 높은 점수를 받긴 어렵다. 10년 전 제작된 일본판 24부작 애니메이션 '기생수' 버전을 본 사람들 입장에서도 한국판 '기생수'는 입체적이지 않고 허점이 많으며, 원작을 관통했던 철학적 물음을 전달하는 데도 부족하다.

'기생수-더 그레이'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이즈미 신이치는 초인적 신체 능력을 갖고 있다. 하이디처럼 뇌를 장악하지 못한 기생생물 '오른손'이 신이치의 심장을 살리는 과정에서 세포 30%를 신이치의 몸에 흡수시킨 결과다. 이후 신이치는 인간의 감정에 둔감해지고, 울고 싶지만 눈물이 나지 않는 일을 경험한다. 원작을 본 이들 입장에선 정수인(전소니 분)이 초인적 신체 능력을 갖지 않는 게 어색하다. 하이디 역시 죽어가는 수인이를 살리면서 자신의 세포를 수인의 몸에 흡수시켰을 가능성이 높아서다. 수인이가 하이디와 결합했지만 극 중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원작과는 괴리감이 있다.

오른손은 신이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뇌를 먹지 못한 기생생물은 인간과 대화할 수 있다. 그러나 하이디는 수인과 직접 대화를 못 하고 편지로 소통한다. 하이디가 힘을 발휘할 때 수인의 자아가 사라지는 대목도 원작과 비교하면 이해할 수 없다. 오른손과 신이치 사이의 소통과 갈등, 공존이야말로 '기생수'를 명작으로 만든 비결이다.

단숨에 야쿠자 22명을 살해한 최강 기생생물 고토는 하나의 몸에 다섯 개의 기생생물이 공존한다. 한국판에선 고토처럼 전신을 무기화하고 총알도 뱉어내는 입체적 기생생물 대신 '상모돌리기'만 하는 단순 기생생물만 등장한다.

원작에선 인간을 먹지 않으려는 기생생물도 등장한다. 인간과 같은 식사를 하며 인간사회에서 생존하는 법을 익힌다. 인간과 공존하려는 기생생물, 타무라 레이코는 원작의 핵심적 캐릭터다. 그는 또 다른 기생생물과의 성관계를 통해 임신-출산을 경험한다. 아이를 키우며 인간의 감정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 같은 기생생물의 진화는 이야기의 흡입력을 높인다. 기생생물끼리도 서로를 의심하며 죽인다. 하지만 'K-기생수'에선 목사 정도를 제외하곤 누가봐도 사회 부적응자로 보이는 단순 기생생물뿐이다.

원작에 등장하는 히로카와 시장은 인간들을 향해 “인구수를 줄여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는 인간의 천적인 기생생물이야말로 자연 피라미드에 맞는 존재이며, 인간이야말로 지구를 좀먹는 기생충, 즉 기생수라 주장한다. 이런 히로카와는 놀랍게도 인간이었다. 히로카와는 원작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을 던진다. 기생생물은 무얼 위해 존재하는가. 이들은 스스로 답을 찾는다. '인간은 지구에 독이 되었고, 중화제가 필요해졌다.' 그렇게 인간 사냥을 합리화한다.

기생생물과 인간 사이에 있는 신이치도 기생생물과 싸우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생명의 무게는 누가 정하나.' 고토를 힘겹게 물리친 신이치는 부활하려는 고토를 죽일지 말지 고민한다. 기생생물은 인간에게 적이지만, 지구에서 태어난 또 다른 생명이다. 돼지나 곰처럼 말이다. 신이치는 '다른 생물을 이해했다'는 건 인간의 자만심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렇게 원작은 인간이 만든 '공존'의 위선을 따져 묻는다.

원작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살인마 대사도 의미심장하다. 인간은 원래 서로 죽여야 하는데 그런 본능을 억누르고 있으며, 본능대로 죽여야 인류가 살고 지구가 산다는 것. 기생생물이 실은 억눌린 인간의 본능을 일깨우기 위한 매개체이자, 인류를 위한 존재라는 식의 주장인데, 영화 '어벤저스'에 등장하는 '타노스의 인구론'과 유사한 흐름이다. 원작을 다 보고 나면 기생생물이 과연 나쁜 존재인지, 인간이야말로 기생생물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기생생물 오른손은 긴 잠을 청한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기 위한, 긴 철학의 시간을 위해서다. '기생수'는 등장 당시 잔인함과 신선함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등장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애니메이션과 실사판 등을 통해 꾸준히 인기를 모으는 이유는 원작이 가진 수많은 질문의 유효함 때문일 것이다. '기생수-더그레이' 시즌2가 나온다면 좀 더 입체적인 기생생물의 등장과, 원작을 뛰어넘는 묵직한 메시지가 함께 던져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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